심리학과 상담학 공부

양들의 침묵에 대한 글

ANJOO 2016. 10. 3. 22:58

영화 양들의 침묵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 '양들의 침묵'은 평점은 높으나 상당히 난해한 영화다. 드러난 스토리는 버팔로 빌이라는 연쇄 살인범을 FBI 수습요원인 스탈링이 감옥에 수감된 천재 정신과 전문의 한니발 렉터의 도움을 받아 붙잡는 이야기다.

하지만 곳곳에 배치된 의미심장한 상징들 때문에 누구도 이런 드러난 스토리가 이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영화가 나온지 벌써 25년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이 영화의 주제나 상징들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난 전부터 이 영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융의 심리학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은 이 영화 '양들의 침묵'을 융 심리학의 관점으로 해석해 보며, 아울러 융 심리학의 제반 내용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한다.

영화 전체를 다루기엔 물량 부담이 되니, 몇 가지 질문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요약해 보자. (그래도 길다)

 

1) 퀴드 프로 쿠오 (Quid Pro Quo; 이것과 저것을 교환한다는 뜻의 라틴어)

* 스탈링이 한니발 렉터에게 연쇄 살인범에 대한 단서를 달라고 하자 렉터는 자기가 힌트를 하나 줄 때마다 스탈링은 개인사의 은밀한 기억들을 털어 놓는 ‘퀴드 프로 쿠오’ 게임을 할 것을 제안한다.

이 퀴드 프로 쿠오 게임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암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단서다. 스탈링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후 영화는 한편으론 연쇄 살인범에 대한 단서가 하나씩 주어지고, 또 한편으론 스탈링의 과거 기억들이 하나씩 관객에게 노출되는 식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이런 병행 전개 구조를 통해 아마도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스탈링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같은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즉 연쇄 살인 사건은 스탈링의 심리적 문제의 은유이고, 그것을 해결하도록 돕는 지하 감옥의 렉터 박사는 자기 치유력을 발휘하는 스탈링 자신의 무의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2) 한니발 렉터는 선인가 악인가?

 

* '양들의 침묵'이 난해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주인공을 돕는 한니발 렉터가 선악의 경계를 넘어선 모호한 존재라는 점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고 날카로운 말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렉터는 결코 호감형 캐릭터는 아니다.

이런 렉터의 모호성 때문에 '양들의 침묵'은 일반적인 범죄 영화와 달리 선악의 대결 구도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묘한 한니발 렉터란 인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힌두교에서 유래하는 범아일여 사상에 따르면 우리 외부의 신성(神性)인 브라만은 우리 내부의 신성인 아트만과 연결되어 있다. 융에게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엿보인다.

그는 우리 무의식의 궁극적 기저에 초개인적 무의식 층위인 셀프(Self)가 존재한다고 보고 있는데, 이 셀프는 일종의 내면적 신성과 비슷한 성격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 사는 삶이 인간이 실존이라고 본 것과 비슷하게, 융은 셀프의 요구를 들으며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완수하는 삶이 건강한 삶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아 실현을 위해 따라야 하는 이런 Self의 요구는 무제약성(Wholeness)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즉 그 요구는 사회적으로 구축된 도덕이나 선악 구분을 넘어서 있다.

셀프의 요구가 갖는 이런 전복적 특성 때문에 셀프는 사회적 안정성을 위협하는 두려운 힘으로 터부시 되곤 한다. 한니발 렉터가 지하 감옥에 갇히고 입에 재갈이 물려지는 것처럼 사회는 이런 셀프와의 접촉을 가능한 한 차단하려 한다.

종교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그 태동을 이끈 신비주의 운동이 이단시되며 종교 바깥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아 실현의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스탈링이 지하 감옥의 한니발 렉터를 찾아가 만난 것처럼, 때론 사회적으로 공인된 가치의 경계를 넘어 진정한 셀프와 직면할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3) 한니발 렉터의 살인이나 인육을 먹는 행동은 무슨 의미인가?

 

* 융에 따르면 개인이 경험하는 심리적 충격과 상처는 의식에서 분리되어 콤플렉스라는 일종의 부차적 인격들을 형성한다. 이 콤플렉스 인격들은 평소엔 의식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트라우마를 만든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면 갑작스럽게 의식의 전면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과거 심한 모욕을 당한 경험 때문에 열등 콤플렉스를 형성했던 사람이라면, 평소엔 정상적으로 행동하다가 누군가 자존심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게 되면 갑자기 그 콤플렉스가 활성화되면서 과도한 분노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 콤플렉스는 이처럼 정신적 불건강성의 징후이기 때문에,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이런 콤플렉스를 해소시킬 필요가 있다. 융은 우리가 셀프의 요구에 듣고, 보다 성숙한 인격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콤플렉스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보았다.

이런 치유의 과정을 신화적으로 변형시킨다면, 셀프가 심리적 조화를 깨뜨리는 콤플렉스 인격을 먹어치우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한니발 렉터가 사람을 죽여서 먹는 행위도 바로 그런 콤플렉스의 치유 과정으로 보아아야 한다.

 

4) 유어 셀프 창고와 Miss Hestler Mofet의 의미는 무엇인가?

 

* 우리는 모두 사회적 관계 속에 습관화된 인격을 갖고 살아간다. 융은 이와 같은 습관적 인격을 그리스어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로 지칭한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보다 성숙한 페르소나를 발달시켜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선 페르소나의 뒷면에 방치되어 있는 잠재적 인격 특질들을 페르소나에 흡수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 융은 그처럼 방치된 인격 특질들을 그림자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마초 스타일을 자신의 페로소나로 삼고 있는 사람은 그런 마초 페르소나 때문에 공감 능력이나 예술적 감수성을 충분히 발달시키지 못했을 수 있다. 바로 그렇게 버려진 잠재적 틀질들이 융이 말하는 그림자에 해당한다.

 

* 영화에서 렉터는 스탈링과의 첫 대면에서 “너 자신을 깊이 바라보라” “헤스터 모펫(Miss Hester Mofet)이라는 사람을 찾아 보라”는 힌트를 준다. 스탈링은 렉터의 이 말을 곱씹은 끝에 볼티모어에 Your Self Storage라는 대여 창고가 있음을 떠올리고, 거기에 10년째 방치되어 있는 Miss Hester Mofet의 물건들을 찾아내 수사의 결정적 실마리를 얻는다.

이 부분의 해석에 관해서는 이미 인터넷에 분석이 많이 올라와 있는데, 스탈링이 찾아간 ‘Your Self Storage’라는 이름의 창고는 다름아닌 스탈링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고, 렉터가 찾아보라고 한 ‘Hester Mofet’은 ‘the rest of me’ 즉 ‘나의 남겨진 부분’을 뜻하는 아나그램이다.

‘Miss’도 미혼 여성을 지칭하는 호칭인 동시에 ‘그리워한다’는 뜻의 동사 ‘miss’이기도 하다. 결국 스탈링이 유어 셀프 창고를 뒤져 미스 모펫의 짐을 수색하는 과정은,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르소나의 그림자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5) 버팔로 빌의 살인은 무엇을 의미하나?

 

* 앞서 말한 것처럼 '양들의 침묵'에서 외부 사건들은 스탈링의 심리적 사건들과 대응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을 죽여 피부를 벗기는 버팔로 빌의 행위는 스탈링의 어떤 심리적 문제를 의미하는 것일까? 버팔로 빌은 본명이 제임 검부인 재단사로 여성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때문에 불법적으로 성전환 수술까지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완벽한 여성이 되기 위해 여성들의 피부로 드레스를 만들어 입으려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한편 스탈링은 FBI라는 남성적 조직 속에서 거친 남성적 성격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영화 중간 중간 스탈링을 향한 남성 동료들의 성차별적 언행이 나온다.

스탈링은 이런 동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터프함을 내재화시키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심층 심리의 세계에 공짜 점심은 없다. 남성적 터프함을 필요 이상으로 추구하다 보면 그 반대 측면인 여성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신경증의 형태로 표출된다.

결국 스탈링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외부적으론 여성이 되길 원하는 연쇄 살인범을 잡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론 여성성의 균형을 상실해 발생하는 신경증적 징후를 치료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6) 스핑크스 나방

 

* 융이 깊은 관심을 보였던 영지주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전통에서 삶의 목표는 영혼을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된다.

이 말을 융의 방식으로 달리 풀어보면, 우리 삶의 목표는 사회적, 본능적 요구들로 인해 충분히 발현되고 있지 못한 무의식 기저 셀프의 요구를 의식적 삶 속에 구현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번데기 속에 갇힌 셀프를 해방시켜 나비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 영화에서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은 희생자를 죽인 뒤에 그 목에 스핑크스 나방의 번데기를 심어둔다. 렉터는 스탈링에게 이런 나방이 변신(transformation)을 상징하는 것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한다. 이후 멤피스 상원 의원의 딸이 버팔로 빌에게 납치되고, 다급해진 상원 의원이 렉터를 직접 만나기 위해 멤피스로 그를 불렀을 때, 렉터는 이 기회를 틈타 간수들을 죽이고 탈출에 성공한다. 렉터가 탈출한 뒤 그에게 희생된 간수는 배가 갈라져 내장이 다 쏱아진 상태로 천정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이 장면은 렉터의 탈출이 고치를 벗고 날아가는 나비의 변태와 같은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7) 스탈링과 렉터의 러브 라인

 

* 셀프의 요구를 듣고 소명을 따르는 자아 실현의 과정은 일종의 드라마와 비슷하다. 이런 드라마에는 개인이나 문화 집단을 넘어서는 인류 공통의 보편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켐벨은 영웅 신화를 분석해 그 안에서 문화권을 넘어서는 공통적 구조를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융도 그와 같은 공통 요소에 주목하고 이것을 아르케 타입이라 부른다. 즉 융의 아르케 타입은 셀프의 요구를 따르는 자아 실현 드라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초개인적 상징과 구조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런 아르케 타입 가운데 융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아니마/아니무스다.

 

* 대개의 드라마가 그렇듯 자아 실현의 드라마에도 남녀 상대역이 필요하다. 그래서 남성의 무의식 속에선 여성인 아니마가, 여성의 무의식 속에선 남성인 아니무스가 그런 상대역을 맡게 된다.

물론 자아 실현의 드라마가 통속 멜로물은 아니기 때문에 아니마/아니무스가 노골적 애정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니마/아니무스에는 분명히 매혹의 힘이 존재하며, 여기에 더해 우리가 셀프의 요구를 드라마에 더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격려하는 프롬프터의 역할을 수행한다.

 

* 앞에서 버팔로 빌의 살인이 여성성의 회복을 필요로 하는 스탈링의 심리적 상태를 대변한다고 했는데, 버팔로 빌은 결국 잡힌다. 그렇다면 스탈링의 여성성은 어떤 식으로 회복되는 것일까? 이 문제의 해결은 영화 속에서 스탈링과 렉터 박사의 희미한 러브 라인으로 표현된다.

이어지는 시리즈 3부 ‘한니발’에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스탈링은 현실의 남성을 연인으로 택하는 대신, 내면의 아니무스(이 경우는 렉터 박사가 그 역할까지 맡게 되는데)와 관계를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성과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종교나 예술의 동기로 변환시키는 기제인 승화와 비슷한 해법을 찾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8) 양들의 침묵은 무엇을 상징하나?

 

* 스탈링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강렬한 경험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보호자인 친척이 경영하는 목태나 목장에서의 경험이다. 어느날 새벽 스탈링은 희미한 새끼양들의 비명소리에 잠이 깬다. 소리를 따라 아래층 창고로 가 보니, 거기서는 많은 새끼양들이 도살되고 있었다.

이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스탈링은 창고의 문을 열어 젖힌다. 그러나 새끼양들은 달아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스탈링은 그중 한 마리 새끼를 안고 찬 새벽에 몬태나 목장을 탈출한다.

스탈링의 품에 안은 새끼양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결국 출동한 보안관에게 스탈링은 붙잡히고 양도 뒤에 도살되고 만다. 그리고 이 일로 화가난 친천은 스탈링을 고아원으로 보내 버린다.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 '양들의 침묵'인 만큼 이 에피소드는 주제를 대변하는 상징일텐데, 그 의미는 과연 무었일까?

 

* 한글로는 ‘양’으로 번역됐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새끼양(lamb)’이다. 다 자란 숫양들은 뿔로 부딪히며 자기 존재를 표출한다. 우리는 때론 도덕적 요구의 형태로, 때론 육체적 욕구로 마음 속에 쿵쿵 육박해오는 강력한 충동들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런 충동들은 다 자란 숫양에 비유할 수 있다.

아직 자라지 못한 새끼 양들은 그와 같은 힘을 갖지 못한 잠재적 충동들이다. 우리가 셀프의 부름을 듣고 고유의 자아 실현 드라마를 발견하는 과정을 융은 개인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적 충동을 키워내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스탈링이 많은 새끼양 가운데 한 마리 새끼양을 품에 안고 탈출했듯, 개인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잠재적 충동들 가운데 자신만의 잠재적 충동을 품어서 그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키워내야 한다.

 

* 그러나 스탈링은 새끼양을 안고 탈출했다가 붙잡혔다. 새끼 양도 도살당했다. 결국 그녀는 렉터와의 만남 이전까지 개인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영화에서 스쳐가는 장면이지만 눈여겨 볼 장면이 하나 있다. 렉터가 처음 스탈링을 만났을 때, 렉터는 그녀가 FBI가 된 이유에 대해 자기 관점에서 설명을 한다.

렉터가 보기에 스탈링이 FBI에 지원한 이유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소명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고아 출신의 소녀로서 안정적 삶을 위해 선택할 유일한 탈출구가 FBI 뿐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링도 렉터의 이런 지적에 간접적으로 수긍한다.

스탈링이 아직까지 개인화를 이루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후 스탈링이 렉터와의 만남을 거듭하며, 그녀 속에 잊혀져 있던 기억인 경찰관 아버지의 순직에 관한 기억이 다시금 환기되고,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소명을 재발견한다.

그녀가 삶의 방편으로 선택한 FBI가 그녀의 소명을 실현하는 자아 실현의 드라마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렉터는 마지막 장면에 스탈링에게 묻는다. 이제는 양들의 비명이 사라졌는지. 이건 다시말해 개인화를 이루었냐는 물음이 된다.

 

* 우리 역시 스탈링과 마찬가지로 셀프와 대면해 자기 고유의 드라마를 찾고, 이를 통해 개인화를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 개인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 무의식의 저변에서 우리를 부르는 새끼양들의 비명이 계속된다. 일상적 삶에 매몰되어 이 소리를 무시하면 꿈이나 신경증의 형태로 이 소리가 표출되기도 한다.

우리가 이 소리에 응답해서 정신의 잠에서 깨어나 새끼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살려낼 때 비로소 이 비명이 멈출 것이다. 그래서 렉터가 스탈링에게 물었듯, 우리 내면의 셀프도 지금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 양들의 비명은 멈추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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